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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_Xe2015



[듣는연재소설]김연수 2020.06.01~06.26.

by JIN 조회 수:196 2020.06.03 12:54

https://audioclip.naver.com/serial/kimyeonsu

1화

[1회] 1부 - 1957년과 1958년 사이

백석 경성부외 서둑도리 656. 일명 기행. 명치 45년 7월 1일, 평북 정주에서 출생. 시인. 오산중학, 동경 청산학원 졸. 영생고녀, 조선일보사 출판부를 역임하고, 현재는 시작에 정진. 저서에 시집 『사슴』이 있다. —문장사 편집부, 「조선문예가총람」, 『문장』 1940년 1월호 1957년과 1958년 사이 우리 빨갛게 타고 타련다. 일곱 해의 첫해에도 일곱 해의 마지막 해에도. —백석, 「석탄이 하는 말」 중에서 1957년의 포베다 벨라와 빅토르는 시인이다. 1924년생으로 둘은 동갑이지만 빅토르가 벨라보다 먼저 고리키 문학대학에 입학했다. 평범한 의사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를 둔 벨라는 모스크바의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편법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녀는 임시로 기술대학에 등록한 뒤, 문학대학 편입을 신청했다. 반면 당 간부를 아버지로 둔데다가 대조국전쟁 부상병이라는 이력을 가진 빅토르는 제대하자마자 문학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재학중이던 스물두 살에 그는 벌써 첫 시집 『승리자의 봄』을 펴내 큰 주목을 받았다. 그 시집에는 제3근위전차군 소속의 전차병으로 드네프르강 전투에 참여했다가 오른팔에 부상을 입고 후송된 그의 개인적 체험이 녹아 있었다. 그 시절의 분위기에 맞게 애국심으로 가득한 시집이었고, 벨라도 질투인지 감동인지 모를 소감을 일기장에 남겼다. 둘은 문학대학 선후배 사이로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은 존경의 마음과 소유의 욕망이 뒤엉킨 것이라 처음부터 폭발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열기와 빛은 점차 사라지리라는 예감이 있었다. 그 예감은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오테펠(оттепель, 해빙)’, 그러니까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의 물결이 조금씩 밀려오면서 점점 더 또렷해지다가 삼 년 뒤 흐루쇼프 서기장이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비밀 연설을 하면서 현실로 나타났다. 대학가에서는 「지마역(驛)」을 썼다가 개인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고리키 문학대학에서 퇴학당한 예브게니 옙투셴코나 건축대학 졸업생이자 파스테르나크의 숭배자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 같은 젊은 시인들의 낭송회가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빅토르도 그 해빙의 물결을 타고 자유의 바람을 맘껏 즐기며 온갖 기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그중에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탄 뒤, “블라디보스토크로!”라고 외치는 짓도 있었다. 그러면 누군가는 “인민의 적이 되는 게 어때?”라고 되묻기도 했다.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시베리아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소위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빅토르에게는 “인민의 적이라면 악의 제국이자 파탄이 난 지상 지옥 미국으로 쫓겨나야지, 왜 아름다운 어머니의 땅 시베리아로 가겠소?”라고 능갈칠 여유까지도 생겼다. 그는 스탈린의 얼음 동상이 녹아내린 물웅덩이에서 물장난을 하는 아이와도 같았다. 그러다가 빅토르는 자신보다 더 미친 택시기사 알렉산드르를 만났다. 카자크의 피가 섞인 그는 자기 조상들처럼 시베리아를 정복할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몇 달에 걸쳐 자동차 여행을 준비했다. 그들은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수십 장의 허가증을 얻기 위해 육십여 곳이 넘는 관공서를 드나들었다. 빅토르의 몽상이 알렉산드르의 실행력을 만나 대륙 간 탄도미사일처럼 날아올랐다. 그리하여 그들은 작가동맹에서 얻은 석 달짜리 공무 여행 증명서와 소수민족들의 언어와 민요 등을 채집할 테이프 레코더와 여행 과정을 촬영할 카메라맨, 그리고 가즈(GAZ)에서 전천후 주행이 가능한 차종으로 새로 생산한, 누적 거리 4262킬로미터의 하얀색 M-72 사륜구동 승용차를 구했다. 그 차에는 ‘포베다(победа, 승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들은 축제 분위기 속에서 모스크바를 떠나기 위해 꽃향기가 흩날리고 깃발들이 펄럭일 노동절을 출발일로 택했다. 벨라에게 북한의 조선작가동맹에서 초청 연락이 온 건 그보다 훨씬 더 전의 일이었지만, 빅토르를 찾아가 그 일에 대해 얘기한 건 1957년 4월 중순이었다. 그녀가 6월에 비행기 편으로 자신보다 먼저 극동에 가게 됐다는 사실을 안 그는 실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선? 작가동맹? 그런 곳에도 동맹씩이나 할 작가가 있는 모양이지?” “그런 곳이라니? 무슨 뜻이지?” 빅토르의 말에 벨라가 반문했다. “말한 그대로야. 며칠 전에도 한 북조선 학생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거든. 지난 전쟁에서 미국의 맥아더가 매일 B-29로 전략폭격을 감행해 그 나라는 석기시대의 폐허로 돌아갔다던데? 그 친구도 낙동강이라는 곳에서 부상을 당했다고 하더군. 표현이 재미있어. 먼저 작은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고, 그다음에 말벌들이 몰려와 독침을 쏘았다는 거지.” 벨라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작은 벌이니 말벌이니, 그게 다 무슨 소리야?” “프로펠러 정찰기가 먼저 오고, 그다음에 폭격기가 몰려왔다는 뜻이야. 독일군도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어.” 빅토르가 설명했다. “그게 시네. 독침을 쏘는 말벌이 하늘을 가득 뒤덮은 풍경. 그 나라에 적어도 시인이 한 명은 있는 셈이네.” “그 친구의 꿈은 시인이 아니라 영화감독이야. 북조선의 미하일 칼라토조프를 꿈꾸고 있지.” 영화 <학이 난다>를 만든 미하일 칼라토조프는 소련에서는 처음으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의 흑백 화면 구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시적이었다. “미래의 칼라토조프를 꿈꾸는 청년이 있는 나라라면 절대로 폐허일 수 없지.” 벨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벨라의 고향은 스탈린그라드였다. 지난 대조국전쟁에서 히틀러의 나치군에 맞서 스탈린그라드의 남녀가 맹렬한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지키려고 그토록 안간힘을 쓴 이유가 무조건 사수하라는 스탈린의 명령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도시는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청춘과 꿈을 묻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 청춘과 꿈의 이야기가 있기에 어떤 폐허도 가뭇없이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1958년의 기린 기행은 시인이다. 그러나 이태 전, 동시를 쓰기 전까지 그의 시를 읽어본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를 소련문학 번역가로 알고 있었다. 조선작가동맹 건물의 노어번역실이 그의 근무지였다. 중복 더위로 후텁지근하던 1958년 7월, 출근하기 위해 대동문 쪽으로 걸어가던 그는 신문 전시대 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봤다. 그들 쪽으로 다가가 살펴보니 1면에 ‘중앙위생지도위원회를 따라 위생방역 사업을 강화하자’라는 제목이 인쇄돼 있었다. 기사는 보건위생 사업이 사회주의혁명의 한 부분인 문화혁명의 중요한 내용을 이룬다며, 여름철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우물에 뚜껑을 덮을 것과 물을 끓여먹을 것과 변소 청소를 철저히 할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별다른 내용이 없는데도 사람들이 몰린 까닭은 그즈음 심각해진 전염병 때문이 아닐까고 기행은 생각했다. 병원으로 환자들이 몰리면서 몇 주 전부터 위생검열이 잦아졌다. 검열관들은 각 가정을 돌며 정리정돈 상태, 의류와 침구의 세탁 상태, 부엌과 변소의 청소 상태 등을 점검했다. 각 사업 단위와 인민반에서는 선전 활동도 활발했다. 그럼에도 전염병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으나 신문에서는 공산주의 건설자로 육성된 인민들의 자발적인 방역 사업으로 사회주의 수도 평양에서 전염병균이 성공적으로 퇴치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기행은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문득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의 머리통과 신문 전시대 위에 기중기의 팔이 건둥 떠 있었다. 광장 주변에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서서히 돌아가는 기중기의 검은 팔에서 빛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거리는 아침부터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날 오후에는 조선작가동맹 아동문학분과에서 2/4분기 작품 총화 회의를 열었다. 기행이 문화회관 소강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회의가 시작된 뒤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몇몇 사람들이 그를 돌아봤다. 기대와 달리 뒷줄에는 빈자리가 없어 그는 앞으로 가야 했다. 걸어오는 그를 보고 단상에서 발언하던 엄종석이 말을 멈췄다. 기행의 귀에 제 구두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의 목덜미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중앙당 문화예술부 문학과 지도위원인 엄종석은 당의 문학 정책을 작가들에게 지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기행은 검질기게 자신을 노려보는 그의 시선을 모른 체하고 빈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는 바짝 깎아올린 머리에 우람한 풍채를 지녀 언뜻 역도선수처럼 보였지만, 일제시대 때부터 지하에서 활동하며 평론을 써온 사람이었다. 기행이 자리에 앉자 그는 하던 말을 이어갔다. “류연진의 시 「송아지」는 고개 너머 장에 간 어미소와 떨어져 외양간에 갇힌 송아지의 외로운 심정을 노래한다지만, 조합의 공동 외양간 목책 속에 송아지가 한 마리밖에 없다는 사실부터가 틀려먹었습니다. 오늘의 우리 협동조합 목장 중에 이처럼 한적한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민들의 생활 현실을 이처럼 혹심하게 왜곡시킬 수 있습니까? 송아지의 이 고독한 심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고독입니까? 모두가 힘을 합쳐 일하는 협동조합 안에 이 송아지처럼 고독을 느낄 만한 사람이 도대체 있을 수 있습니까?” 기행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펼친 페이지에는 간밤에 긁적인 몇 개의 단상들이 적혀 있었다. 옆 사람이 볼세라 그는 얼른 빈 페이지를 찾아 넘겼다. 그리고 엄종석의 말을 두서없이 적었다. 송아지, 외로운 심정, 누구를 위한 고독…… 뒤이어 엄종석은 다른 시인의 시를 거론하며 높이 평가했다. 기행은 그런 평가를 받은 시구도 받아 적었다. 조국의 불기둥, 기중기를 돌리며, 붉은 깃발…… 그래서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엄종석이 갑자기 그의 시를 읽었다. 기린아, 아프리카의 기린아, 너는 키가 크기도 크구나 높다란 다락 같구나, 너는 목이 길기도 길구나 굵다란 장대 같구나. 네 목에 깃발을 달아보자 붉은 깃발을 달아보자, 하늘 공중 부는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라고, 백 리 밖 먼 데서도 깃발이 보이라고 그건 기행이 지난해 『아동문학』 4월호에 발표한 동시들 중 하나인 「기린」이었다. 일 년도 더 전에 쓴 시가 왜 불려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엄종석은 기행에게 턱짓을 했다. “오늘 지각한 동무, 본인이 쓴 시가 맞소? 일어나서 다른 동무들에게 왜 하필이면 기린에 대해 쓰게 됐는지 말해보시오.” 기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다들 그를 쳐다봤다. “아이들에게는 사상성보다 교양성을 심어주는 게 우선입니다. 그래서 먼 나라의 다양한 동물들을 재미나게 소개하고 그 특징을 이용해서 사상성을 드러내려고……” 엄종석이 기행의 말을 잘랐다. “지금 동무에게 강의를 듣자고 했소? 내 말은, 왜 여기서 기린이 나오느냔 말이오?” “무엇을 물어보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프리카 기린에 대해 쓰면 안 되는 것입니까?” “우리나라에 있는 곰이나 범을 두고, 왜 머나먼 아프리카의 기린을 끌고 와 붉은 깃발을 다느냔 말이오?” 기행은 말문이 막혔다.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니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엄종석은 그런 그를 비웃듯이 바라봤다. “아직도 순수문학의 잔재가 남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해하지 못하니 안타깝소. 동무는 우리의 서정이란 우리나라 아동들의 실지 생활감정에 의거해야만 한다는 당의 창작 지침을 여태 이해하지 못하겠소? 아프리카의 기린이라면 거기다가 붉은 깃발을 달든 푸른 깃발을 달든 무슨 상관이오. 우리의 동물이어야 붉은 깃발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단순히 재미난 것을 아동들에게 소개하겠다고 들면 이런 모호함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른 동무들도 명심하시오. 이 시에는 주체적인 우리의 생활, 우리의 감정이 없소. 주체적으로 시를 창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으니 아프리카의 기린 같은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겠소.” 아무리 노죽을 부려도 퇴짜를 놓는 여인 앞에 선 구혼자처럼 기행은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기린을 생각했다. 기행이 자리에 앉고 나서도 그런 식의 작품 총화 회의가 계속됐다. 그때까지도 기행은 기린을 생각했다. 붉은 깃발을 목에 매단 기린이 그의 눈에 보였다. 엄종석이 옳았다. 기린에게는 붉은 깃발을 다는 게 아니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다음 편에서...